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블랙홀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우주의 괴물이 어떻게 스스로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학 시절 천문학 공개 강연에서 "블랙홀도 결국 증발한다"는 말을 듣고 완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저 어딘가의 블랙홀도 언젠가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하게 쓸쓸함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저는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하게 됐습니다.
호킹 복사와 블랙홀의 증발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조차 입자를 방출하면서 서서히 증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바로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입니다. 여기서 호킹 복사란 블랙홀 주변 사건의 지평선에서 양자역학적 효과로 인해 입자가 생성되고, 그 중 일부가 블랙홀 밖으로 방출되면서 블랙홀의 질량이 서서히 줄어드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마치 온도를 가진 별이 빛을 방출하듯, 블랙홀도 흑체 복사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는 개념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복사가 블랙홀의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질량이 무거운 블랙홀은 사건의 지평선이 워낙 거대해서 시공간 곡률이 완만하지만, 질량이 작은 블랙홀은 사건의 지평선도 작고 곡률이 심하게 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호킹 복사는 블랙홀이 무거울 때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다가, 점점 블랙홀이 증발하고 가벼워질수록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집니다. 만약 블랙홀이 소행성 정도로 가벼워진다면,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상당한 양의 빛을 눈부시게 토해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블랙홀이 마지막 순간 폭발하듯 사라진다는 게 영화 같은 상상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론물리학계에서는 호킹 복사를 통해 블랙홀의 열역학적 특성을 이해하고, 양자중력 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고 봅니다(출처: 한국천문연구원). 하지만 아직까지 호킹 복사를 직접 관측한 사례는 없습니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우주 곳곳에서 이 전설 속의 신호를 찾고 있습니다.
원시 블랙홀과 중성미자 검출
빅뱅 직후 우주 전역에는 수많은 원시 블랙홀(Primordial Black Hole)이 태어났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여기서 원시 블랙홀이란 별의 중력 붕괴가 아니라, 초기 우주의 극도로 높은 밀도 상태에서 직접 형성된 블랙홀을 뜻합니다. 이들은 서로 빠르게 충돌하고 덩치를 키웠고, 오늘날 은하 중심에 사는 초거대 질량 블랙홀의 씨앗이 되었을 거라고 과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초기 우주에 정말 많은 가벼운 원시 블랙홀이 존재했다면, 당연히 멀리 떨어진 과거 우주를 관측할 때 이들이 토해냈던 눈부신 섬광을 포착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분명 우주의 한때 존재했을 이 원시 블랙홀들이 토한 고에너지 입자들도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어야 하죠. 2023년 2월 13일, 지중해 바다 깊은 곳에 설치한 중성미자 검출기 KM3넷(KM3NeT)에서 놀라운 신호가 검출됐습니다. 무려 220 페타 일렉트론볼트(PeV) 수준의 엄청난 에너지를 머금은 중성미자였습니다. 페타 일렉트론볼트란 10의 15제곱 전자볼트를 의미하는데, 현재 지구에 있는 가장 강력한 입자 가속기로 만들 수 있는 입자의 에너지보다 1만 배 이상 높은 수준입니다. 천문학자들은 이 중성미자가 빅뱅 직후 1초도 지나지 않았을 때 탄생했던 극초기 원시 블랙홀이 소멸하며 토해낸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당시 검출기에 감지된 중성미자 흔적을 분석한 결과, 만약 범인이 정말 원시 블랙홀이었다면 산 하나 수준의 질량을 지닌 블랙홀이 겨우 12억 km 거리에서 증발했을 때 방출한 것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정도 거리면 토성까지 거리밖에 안 됩니다. 제가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믿기 어려웠습니다. 빅뱅 직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원시 블랙홀이 태양계 안에서 우연히 소멸했고, 그때 방출된 고에너지 입자가 지구에 날아왔다는 이야기는 확률적으로 너무 낮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 중성미자 검출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깊은 바닷속이나 남극 얼음 아래에 거대한 장비를 묻어두고 '한 번 지나갈지도 모를 입자'를 기다린다는 사실 자체가 거의 수행 같았습니다. 실제로 고에너지 중성미자를 만드는 건 원시 블랙홀뿐만은 아닙니다. 감마선 폭발, 초신성 폭발과 같은 다른 강력한 현상들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만약 정말 원시 블랙홀이 소멸할 때 남긴 중성미자라면, 정확하게 블랙홀이 사라지는 순간뿐 아니라 그 이전 몇 시간 전부터 지속적으로 비슷한 레벨의 감마선도 함께 검출되었어야 합니다. 연구팀은 남극 얼음 아래 설치한 아이스큐브(IceCube) 중성미자 검출기 데이터, 티베트 고고도 지역의 라소(LHAASO) 관측소 데이터, 멕시코 시에라 네그라 화산의 호크(HAWC) 관측소 결과를 함께 비교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또 다른 중성미자나 감마선의 흔적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정말 원시 블랙홀 때문이었다면, 최소 라소에서는 블랙홀이 소멸하기 전 7~14시간 사이 수억 개가 넘는 감마선을 포착했어야 했습니다. 결국 KM3넷에 포착된 초고에너지 중성미자를 날려 보낸 범인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슬프지만 우리 태양계 안에 끼어 들어왔던 원시 블랙홀은 더더욱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떠돌이 블랙홀의 발견
한편, 블랙홀 연구에서 또 다른 놀라운 발견이 있었습니다. 한국천문연구원은 NGC 5252라는 은하에서 은하 중심에서 3만 광년 떨어져 떠돌고 있는 거대 블랙홀을 발견했습니다. 태양 질량의 백만 배가 넘는 거대 블랙홀은 보통 은하의 중심에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번 발견은 그 통념을 깨는 사례였습니다. 이 발견을 위해 찬드라 X선 위성 망원경, 마젤란 6.5m 망원경 등 세계 유수의 망원경이 사용되었습니다. 찬드라 망원경으로 X선 신호를 처음 포착한 뒤, 마젤란 망원경을 이용한 분광 관측을 통해 이 블랙홀이 NGC 5252 은하를 떠돌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여기서 분광 관측이란 천체에서 나오는 빛을 파장별로 분해하여 화학 조성, 온도, 운동 속도 등을 분석하는 방법입니다. 추가로 갈렉스(GALEX) 자외선 위성 망원경, 허블 우주망원경, 캐나다-프랑스-하와이(CFHT) 3.6m 망원경 데이터를 융합하여, 이 대상이 태양 질량보다 적어도 1만 배 무거운 초거대 블랙홀임을 밝혀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정말 블랙홀이 맞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은하 중심이 아니라 3만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서 홀로 떠다닌다니, 뭔가 우주의 질서가 잠깐 흐트러진 느낌이었습니다. 떠돌아다니는 거대 블랙홀은 지금까지 알려진 경우가 1~2건에 불과할 정도로 과학적으로 매우 희귀한 발견입니다(출처: 한국천문연구원). 이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희귀한 천체를 찾았다는 의미를 넘어, 은하 병합 과정과 블랙홀 성장 시나리오를 검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하들이 충돌하고 병합할 때, 각 은하 중심에 있던 블랙홀들도 함께 상호작용합니다. 대부분은 결국 하나로 합쳐지지만, 일부는 중력 상호작용으로 인해 은하 밖으로 튕겨 나가거나 은하 주변부를 떠돌 수 있습니다. 이번 발견은 그런 시나리오를 뒷받침하는 관측 증거입니다. 현재 이 대상의 정체를 정확히 밝히기 위해 제미니 8.1m 망원경과 VLBA(Very Long Baseline Array) 전파 망원경을 이용한 후속 관측이 진행 중입니다. 특히 발견된 블랙홀의 질량이 태양 질량의 1만 배 정도인 중간질량 블랙홀(Intermediate-Mass Black Hole)로 확정된다면, 항성 질량 블랙홀에서 초거대 질량 블랙홀로 성장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저는 X선, 분광 자료, 자외선 데이터까지 동원해 교차 검증했다는 설명을 읽으면서, 과학은 결국 하나의 관측이 아니라 여러 증거의 겹침 위에 서 있다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다양한 파장대의 망원경을 융합하여 세계적인 성과를 낸 연구진의 노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추정하는 우주 진화 모델에 따르면 분명 우주는 한때 원시 블랙홀을 왕창 만들었던 시기를 거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지금쯤 전부 덩치를 키워서 은하 중심 초거대 질량 블랙홀로 변해 버렸거나, 미처 합체하지 못한 작은 블랙홀은 이미 빠르게 증발하고 소멸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우주 어딘가엔 원시 블랙홀들이 사라질 때 남긴 고에너지 입자가 정처 없이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어야겠죠. 아쉽게도 이번 논란은 원시 블랙홀의 존재를 확실하게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또 다른 아주 커다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린 감마선, X선과 같은 고전적인 고에너지 전자기파뿐 아니라 중성미자라는 새로운 눈으로 우주를 함께 바라보고, 이들이 어디서 오고 있는지 지도를 그리는 새로운 멀티메신저 천문학(Multi-Messenger Astronomy) 시대를 열어 나가고 있습니다. 멀티메신저 천문학이란 전자기파, 중성미자, 중력파 등 서로 다른 종류의 신호를 동시에 관측하여 우주 현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연구 방법입니다.
결론
결코 관측하지 못할 거라 단언하고 포기했을 법도 한 중력파 역시 결국 끈질긴 사냥 끝에 포착에 성공했습니다. 저는 아직 블랙홀을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관측 데이터와 이론이 맞물려 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보지 못한 것조차 조금은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머지않아 끈질긴 천문학자들의 노력 끝에 또 다른 전설 속의 존재, 원시 블랙홀의 꼬리도 밟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못다 이룬 꿈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날이 온다면, 저는 다시 한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감동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VEMHjPH3hJg, https://www.kasi.re.kr/kor/post/mainResearch/3020